우리나라 사람의 귀걸이 착용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귀걸이는 신석기시대에 유물 속에서 옥으로 만든 귀걸이가 발견되면서 선사시대부터 착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는 주술적 의미로써 주로 특별한 역할이 있는 고위 계층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장식품으로 목적성이 바뀌며 삼국시대에 들어서는 남녀가 모두 착용할 정도로 매우 유행하게 됩니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다양한 재료와 화려한 세공기술로 만들어진 비싼 귀걸이가 만들어졌고
이는 고위 계층이 주로 착용하며 높은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이어 조선시대 초기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귀걸이를 종종 착용하였습니다.
세종실록을 살펴보면 금, 은과 같은 자원은 주로 수입하여 비싸기 때문에 사대부의 귀걸이 등의 장식품을 제외하고는 사용을 금한다는 사실이 남겨져 있습니다.
지체가 높은 사대부의 경우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종종 착용했기 때문에 예외품목으로 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평민에게서도 금, 은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를 착용하는 모습이 발견되자 국가적으로 자제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이 후 고위층이 아닌 경우 금, 은이 아닌 다양한 재료로 귀걸이를 만들어 착용하였습니다.
이처럼 귀를 뚫어 귀걸이를 착용하는 것은 사대부뿐만 아니라 평민, 군인에 이르는 보편적인 풍습이었습니다.
1) 귀걸이로 사람을 판별할 수 있다?
귀걸이의 구멍 크기에 따라 신분의 고하를 판별할 수도 있었습니다.
중종실록, 만손이란 사람의 양평군 사칭사건이 있습니다.
양평군은 연산군의 후궁 소생으로 이미 사망하였는데 누군가 이를 사칭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중종은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귀걸이 구멍을 살펴보았다고 합니다.
양평군은 커다란 진주귀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는 큰 구멍을 뚫어 착용하는 대환귀걸이였다고 합니다.
대환귀걸이는 평민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 귀걸이구멍을 통해 신분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 조선인을 증명하는 방법
1) 조선군과 일본군을 구분하는 방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은 얼마나 많은 조선군을 죽였는 지를 시체의 머리가 아닌 귀나 코를 잘라 증명했습니다.
귀나 코를 많이 가져가면 포상을 받을 수 있으므로 종종 자신의 공을 부풀리기 위해 아군의 시체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누구의 시체인 지 알 수 없던 때, 조선군과 일본군의 귀를 구별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귀걸이 구멍이었습니다.
귓불을 뚫은 흔적이 있으면 조선군, 없으면 일본군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는 귀무덤이라는 것이 남아있습니다. 이는 조선군의 귀와 코를 매장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2) 조선인과 한족을 구분하는 방법
어우야담은 16세기~17세기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안정란이라는 이름의 역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정란이란 역관은 중국어를 잘하여 여러 차례 중국으로 일을 떠나게 됩니다. 하루는 안정란이 한족들과 함께 한족 복장을 갖추고 기생집에 가게 되는데 이때, 기생 중 한 명이 그의 귀걸이 구멍을 보고는 조선인인 것을 알아챘다고 합니다.
이처럼 귀를 뚫어 귀걸이를 하는 문화는 일본인, 한족에게는 발견되지 않는 조선인의 특징이었습니다.
선조, 귀를 뚫는 풍습을 금지시키다
조선시대, 유교문화발달로 귀를 뚫는 풍습이 사라졌을 것 같은데 언제까지 남아있었을까요?
1572년 9월 28일 선조는 '신체발부수지부모'의 뜻으로 조선팔도 남자들이 귀를 뚫고 귀걸이를 하는 풍조를 없애도록 한다는 금지령을 내립니다.
이는 국제적 정세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귀를 뚫는 풍습은 주로 북방민족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1570년, 중국은 한족이 다스리는 명나라였습니다.
몽골(북방민족)의 압박을 받던 명나라는 이들을 오랑캐라 일컬으며 그 풍습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귀를 뚫는 북방민족의 풍습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남녀가 귀걸이를 자유롭게 착용하며
귓불뿐만 아니라 귓바퀴, 기타 연골부 등 다양한 부위를 피어싱하여
장식용으로 귀걸이를 이용합니다.
P.S 귀걸이, 귀고리 모두 국립국어원에서 인정한 표준어이므로 편하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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